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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생각

미내사 헬링거 선생님 워크샵

by 열린공간 2020. 4. 14.
靈의 얽힘과 풀림에 관한 대화, 가족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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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크샵 소개

2002년 초 미내사는 국내에 처음으로 세계적인 테라피로 성장하고 있는 ‘가족세우기’를 ‘지금여기’를 통해 소개하였으며 창시자인 버트 헬링거 선생으로부터 배운 박이호 선생을 통해 워크샵을 해왔습니다. 말 그대로 가족을 구성원의 직관에 따라 세움으로써 세워진 각자의 위치가 현재의 가족이 직면한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여 의식,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패턴을 보게 하는 신선하고 놀라운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오는 2004년 3월 3~4일 양일간 가족세우기 창시자인 버트 헬링거(Bert Hellinger) 선생이 내한하여 직접 특별 워크샵을 진행합니다. 가족구성원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가족관계가 이렇게 소원해졌는지, 왜 이런 질병이 가족에게 나타나는지 등을 미세한 눈으로 파헤치고 해원(解怨)시키는 가족세우기의 놀라운 힘을 경험해보십시오. 타인의 가족세우기를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한층 가벼워질 것입니다.

강사버트 헬링거(Bert Hellinger)
통역박이호 선생
주최 미내사 클럽ㆍ한국가족세우기
일시2004년 3월 3일(수) 오후 02:00~ 저녁09:30, 3월 4일(목) 오전10:00~ 오후06:00
장소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 (지하철 1호선 대방역 3번 출구) -- [약도보기]
참가비14만원
입금처농협 053-02-185431 (예금주 : 이원규)
신청 및 문의02-747-2261~2 (※ 예약 필수이며 3월 2일 오후 6시까지 예약 바랍니다.)
참고사항※ 실제 무대에서 세우기를 하실 분은 선착순 20명으로 제한합니다.


■ 강사 소개
버트 헬링거(Bert Hellinger)

1925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30여년 이상을 가족치료에 몸담아왔다. 이제 그는 체험을 통해 행동을 직접 변화시키는 강력한 툴인 가족세우기 국제워크샵만을 행한다. 20세 때 어릴 적의 꿈을 깨닫고는 카톨릭 교회에 들어갔다. 여러해의 영적 수련후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서 줄루족과 살았으며 학교에서 지도하고, 교구 신부로서 활동했다. 줄루족과의 시간은 그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과의 삶이 마치 고향에 있는 듯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그는 그룹 다이나믹을 통해 영국 성공회 신부로부터 인종을 초월한 세계교회주의 훈련을 받았다. 16년 후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이 종교사회의 일원으로서 매우 평화적으로 자라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결혼하고 심리치료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에는 심리분석 훈련을 받았고 여러 분야의 더 나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몇몇 다른 접근법들도 배웠다. 또 하나 중요한 훈련은 프라이멀 요법(Primal Therapy)이다. 거기에서 버트는 한 사람이 표현되지 못한 제1차적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것을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사람을 돕는 그의 능력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그룹 다이나믹을 연구했고, 각 종족의 문화를 공부했으며 게쉬탈트 치료법, NLP, 밀튼 에릭슨 기법, 홀딩 요법, 그외 많은 형태의 가족치료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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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세우기 워크샵 참가 후기① (지금여기 7-2호에서 발췌)

보이지 않는 은줄로 연결된 가족의 형태장
이원규

루퍼트 쉘드레이크는 인체에 형태형성장이라는 에너지장이 있어 거기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 개체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는 놀라운 이론을 발표하여 세간에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았습니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한 가족에 그 가족 고유의 형태장이 있어 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으며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실증해보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버트 헬링거 씨입니다. 그는 "가족세우기"라는 독특한 테라피를 통해 개인의 어려움을 가족의 어려움으로 확대하여 쉽게 풀어내고 있어 소개해봅니다. 2002년 2월 24일 구로구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모임을 일부 소개합니다. 필자가 직접 참여하여 대역을 하기도 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신선한 체험과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워크샵이었습니다. 20여명이 참여하였는데 한분에 대한 것만 간략히 적어봅니다.

3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그녀는 밝아보였다. 잘 웃었으며, 가볍게 삶의 무게를 지고 서있는 듯했다. 그녀가 가족의 이야기를 단순히 시작했다. "큰아들과 남편의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아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박이호 선생은 즉시 그녀에게 다른 참가자들 중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남편, 그녀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그녀는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느낌이 적당한 사람을 한사람씩 골라내었다. 나는 그녀의 남편 역할을 하도록 지목 받았다.
이제 그 가족 대역들을 그녀의 느낌에 맞도록 위치와 방향, 간격 등을 고려해 세울 차례이다. 그녀는 남편과 작은 아들이 마주보고, 큰 아들은 그녀 대역과 마주보게 세웠다. 남편 역할의 나를 중심으로 설명해보면 나의 좌측 가까이에 그녀 대역이 서고, 정면에서 좌측으로 작은 아들, 우측에 좀 떨어져서 큰 아들을 세웠다. 이때 나의 느낌은 정면에 보이는 작은 아들을 가깝게 느꼈고 우측에 있지만 엄마 쪽만을 보고 있는 큰 아들은 먼 남처럼 느꼈으며 좌측 가까이 붙어 있지만 큰 아들을 향하고 서있는 그녀 대역은 아내라기보다 남에 더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박이호 선생이 그녀에게 바로 윗대의 가족 중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6.25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컸으며, 어머니도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양녀로 들어가 커왔다고 했다.
"아, 그래요. 그러면 부모님을 세우세요." 박이호 선생의 지시가 이어졌다. 그녀는 부모에 적당한 두 사람을 선택해 내 좌측 멀리에 세웠다. 그러자 그녀 대역에게 질문이 주어졌다.
"지금 느낌이 어때요? 그 자리가 편한가요?"
"아니요."
"그럼 이리로 옮겨 보세요." 박이호 선생은 그녀 대역을 내게서 떼어내며 뒤돌아 그녀의 부모가 있 는 쪽을 향하게 했다. 순간 나는 그녀를 다시 내 쪽 으로 끌어오려는 충동을 느낌과 동시에 큰 아들이 더 이상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것에 내심 놀랐다.
"지금은 어때요?"
"아까보다 편해요."
"자, 이제 본인과 바꾸세요." 박이호 선생은 대역을 돌아가 앉게 하고 그녀 본인을 그 자리에 서게 했다. 이제 그녀는 전 가족을 뒤로 하고 그녀의 친정부모를 향하도록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게는 알지 못할 슬픔이 밀려왔다. 이것은 분명 머리로 이 가족의 상황을 이해한 데서 오는 주관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서있음으로 해서, 남편의 대역 위치에서 작은 아들과 큰 아들, 아내와 아내의 친정 부모가 절묘하게 서로를 심정적으로 밀고 당기며 서 있는 그 위치에서만 느낄 수 있는 느낌이었다.

잠시 그 상태로 침묵이 흘렀다.

……………………………

그런데 머지않아 그녀의 눈 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친정 부모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만큼 가까이 가보세 요." 박이호 선생의 지시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조 금 움직여 보다가 멈추었다. 이제는 어깨를 들썩이며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녀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서있자 박이호 선생은 그녀의 등에 손을 대어 친정부모 쪽으로 밀었다. 그 순간 한(恨)과도 같은 깊은 슬픔이 내게 밀려왔다. 그리고 어느새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현실적으로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그녀는 뒤에 남겨지는 가족의 붙잡는 손들을 느끼는 듯 멈칫 멈칫 했다.
그녀는 이제 더 많이 떠밀려 나란히 서있는 부모 앞으로 데려가졌다. 그러자 모두가 들을 정도로 "엄마!--"라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부모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길을 잃었다 다시 부모를 찾은 어린아이와 같이 엄마를 부르며 그들을 부등켜 안고 울고 있었다. 친정 부모의 대역자들 눈에서도 어느새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아들들도 울었다. 친정 부모의 대역을 맡은 이들은 실제 나이들이 그녀보다 훨씬 어려보였지만 어느새 부모가 되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주변에 둘러앉은 다른 참가자들도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는 듯 붉게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시 원래의 가족을 바라보도록 세워졌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그동안 내가 느낀 감정들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나는 맨 처음 작은 아들만 친하게 느껴질 뿐, 그녀와 큰 아들은 남처럼 느껴졌었다. 특히 아내보다 더 떨어져 있던 큰 아들은 먼 남이었다. 이는 그녀가 말한 대로 큰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느낌으로 전해주는 위치였던 것이다.
그녀가 친정 부모를 향해 돌아서자 남처럼 느껴지던 큰 아들이 내 가족이라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친정부모를 향한 그녀와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으려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내 가족을 온전히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녀가 우리를 멀리하고 친정부모 쪽으로 향할 때도 나는 다시 이 모두를 끌어안아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다 그녀가 부모의 품에 안겨 크게 울 때는 모든 것을 잊고 그 슬픔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나를 향해 세워졌다.
"나는 우리 부모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한 여자입니다. 저를 여자로 받아주세요."라고 말하도록 박이호 선생이 그녀에게 지시했다.
"나는 우리 부모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한 여자입니다. 저를…" 그녀는 왠일인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멈추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주저하며 "여자로 받아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박이호 선생은 남편 대역인 나에게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느꼈던 모든 것을 전부 얘기했다.
먼저 처음의 큰 아들과의 거리감. 둘째, 그녀가 돌아섰을 때 큰 아들이 내 가족으로 느껴진 점, 친정부모를 향해 가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던 점. 다시 돌아왔을 때 한 가족 전부를 품에 안고 싶었던 점. 그녀가 "여자로 받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멈칫거릴 때 왜 하지 못할까 의아해 하며 빨리 그 말을 하고 가까이 오기를 안타까워했던 점 등.
그러자 박이호 선생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들었죠?"
"네"
"다시 한번 해보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우리 부모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한 여자입니다. 저를 여자로 받아들여 주세요."
이번에는 전혀 주저함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때요, 되었지요?" 박이호 선생이 해원(解怨)한 그녀의 마음을 보는 듯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이번 세션을 끝맺었다. 모두 끝나고 나중에 그녀가 물었다.
"큰 아들과 남편의 사이가 안 좋은데 왜 그런 관계도가 나왔을까요?"
"가족세우기를 해보셨는데 아직 모르시겠어요?" 박이호 선생이 되묻는다.
"아니, 알겠어요." 그녀의 답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동시에 관계 전체를 보고난 입장의 그녀는 뭔가를 깨우친 듯 했다.
내가 느낀 것은 늘 친정 부모를 불쌍히 여기고 마음에 담고 있던 그녀가 부모를 대신할 현실적 대안으로 큰 아들만을 바라본 것이 남편에게 전해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은 아내나 그녀의 친정부모를 미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느낀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친정 부모 대신이었던 큰 아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그녀가 친정부모를 향해 돌아섰을 때 갑자기 큰 아들이 가족으로 느껴졌고 감싸안아야 되겠다는 감정이 솟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큰 아들을 더 이상 부모 대역으로 삼지 않는 상황을 뜻한 것이니까. 또 그녀가 여자로 받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 스스로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늘 부모의 자식으로서만 존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그녀 자신도 그 동안 사이가 좋았던 남편에게 왜 그 말을 하지 못했는지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렇게 그녀의 가족세우기에서는 겉으로 표현된 아들과 남편간의 소원함이, 부모에 대한 동정심으로 큰 아들을 보아온 그녀의 마음속 응어리에서 유래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역학관계를 밝혀 보여줌으로써 그 응어리가 풀어진 것이 놀라웠다. 가족관계라는 커다란 사각형에서 한쪽 끝만 문제가 생겨도 사각형 전체가 일그러진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 이미 돌아간 사람들과 얽혀 있는 가족의 에너지장을 밝혀 드러내보인 가족세우기는 신선한 영감과 지혜를 일깨워주었다. 현재 가족들간의 역학관계가 이들만의 주고받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것을 여실히 체험하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것도….




가족세우기 워크샵 참가 후기② (지금여기 7-3호에서 발췌)

마음속의 무거운 추를 걷어낸 시간

김희영(대학생, 가명)

가족세우기 워크샵에 참가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일주일 동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매일 하던 식으로 똑같이 하던 일들을 계속했지만, 마음은 사뭇 달랐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지만 힘이 나고, 마음이 가볍고, 뭔가 나를 긴장시키며 옭아매고 있던 응어리가 풀어진 느낌. 그리고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 "내 딸아, 내 딸아…"

가족세우기에 대해서 알게된 것은 얼마전이다. 미내사 소식지를 뒤늦게 아는 분을 통해 전해 받아 보고서는 너무도 신기해서 사실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느 워크샵에서 나온 사례를 간략히 소개한 것이니만큼 아무래도 글로는 다 표현되지 못하고 빠진 부분이 있었겠거니… 하고 이해를 하려 해봐도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대역으로서 어떻게 그런 느낌을 가질 수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우리 가족 내에 얽혀 있는 문제도 그 사례처럼 머리로 생각해서는 나올 수 없는 부분에서 풀리게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워크샵 시작 이틀 전에 부랴부랴 신청을 했다.
워크샵 첫날. 장소가 낯설어 헤메다 보니 약간 늦었는데, 이미 강의실에는 열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둘러앉아 눈을 감고 무엇인가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연배를 보니 거의가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었고, 이런 식의 치료작업(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에 익숙한 듯한 분위기였다. 상담을 전공하고 있는 나로서도 둥글게 둘러앉은 강의실 풍경이 마치 집단 상담을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많이 긴장되지는 않았다. 박이호 선생님 왼쪽에는 빈의자가 하나 있어서, 선생님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을 그 의자에 앉도록 하셨다.
머리를 내려놓고 가슴으로 느껴라… 내가 늦어서 듣지 못한 부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듣지 못했는데도 나름대로 그 말을 실천한 탓인지, 아니면 내가 받은 느낌이 너무 강렬한 것이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돌아보면 세세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냥 첫날에 한 두분인가 먼저 하시고,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갑자기 내게 무슨 질문을 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선뜻 일어나 의자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것만이 기억난다.
내게 있어,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아니, 가족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지난 겨울, 집단 상담에 참여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 가족 이야기를 여러 사람 앞에서 했다. 그게 단순한 부끄러움인지, 아니면 가족에 대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어릴 때부터 내게는 밖에 나가서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강박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도 한번도 털어놓지 않았고, 대학시절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딱 한번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그때 그게 처음이었다는 이유로 그 남자친구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했었다.) 지난 겨울 가족 이야기를 하고 나서,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아무런 판단없이 수용해주는 것을 경험하고, 내 안에서 어린 시절의 슬픔이 그동안 너무 억눌려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훨씬 편해졌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내게 풀어 나가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풀어나가는 작업의 하나로 가족세우기에 왔는지도 모른다.
한번 이야기를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가족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크게 망설임 없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초점을 두고 내놓은 문제는 각도가 조금 달라져서, 엄마와 언니의 갈등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박이호 선생님의 말대로 하면 엄마가 아니라 "새엄마"라고 불러야겠지만(세상에 엄마라는 분은 낳아주신 분 한분 뿐이므로…) 나는 새엄마라고 별로 부르고 싶지 않다. 한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구분을 짓기 위해서 새엄마라고 써야 할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때 돌아가셨다.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셨다. 나는 그당시 뭐가 뭔지 몰랐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새엄마가 오셔서 친척들이나 가족들이나 모두 "안좋은 일은 그냥 덮자. 뭐하러 꺼내나..." 하며 쉬쉬하는 분위기라서 아직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 그냥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만 들었다. 새엄마는 내가 어릴 때 오셔서 나하고는 사이가 정말 좋다. 성격도 잘 맞고, 가족들에게 정말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푸셔서 사실 한번도 새엄마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내가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도, 새엄마에 대한 어떤 편견 때문에 혹시 남들이 오해를 할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나하고 네 살 차이가 나는 언니는 새엄마와 갈등이 심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서로 무엇인가 맞지가 않는다. 사춘기 때 새엄마를 만나서 그런 탓도 있고, 언니가 원체 독립적인 성격인 탓도 있겠거니… 생각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서로 위하고 잘해주려고 하는데도 번번이 오해가 생기고, 서로 상처를 입고, 그러면서 대화로 풀어버리지도 못하는 모습이 다 설명이 안되는 것 같다. 중간에 있는 나로서는 항상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선생님은 "그래요, 그럼 한번 세워보세요."라고 하셨다.
가족의 대역으로 나, 언니, 아빠, 엄마, 새엄마의 대역을 세우고 나니 "혹시 다른 동생은 없나요?"라고 물으셔서 "새엄마가 언니랑 저를 위해 아이를 더 안 가지기로 결심하셔서 아이를 지운 적이 한번 있어요."라고 했다. 그래서 동생의 대역까지 한 분 세우게 되었다. 나름대로 배치를 한 것이, 나와 새엄마가 나란히 약간 떨어져서 아빠를 마주보고 서고, 언니가 엄마의 오른쪽에 조금 멀리 떨어져서 새엄마, 아빠, 나를 바라보고 마치 원 밖에 나가 있는 것처럼 서고, 엄마는 언니를 약간 비켜서 언니보다 더 뒤쪽으로 서고, 동생은 아빠 뒷편쯤인가로 세웠다. 중간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각 대역들에게 선생님이 "지금 그 자리가 어때요?" "지금 기분이 어때요?" "지금 느낌이 어때요?"라는 질문을 하면서 조금씩 배치가 바뀌더니 새엄마와 동생이 마주보는 형태로 서게 되었다. 새엄마 대역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말에 "내 아기"라고 대답했고, 동생 대역은 "나도 엄마가 좋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새엄마도 동생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는 그 모습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전까지 배치가 바뀌는 움직임들을 담담하게 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선 이제까지 한번도 새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그런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생명을 지우면서 새엄마 마음이 어땠을지… 그리고 혹시나 살아오면서 자신의 핏줄이 없다는 것에 후회한 순간이 없었을는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시야가 눈물로 흐려졌다. 앞으로 새엄마가 동생 일로 후회하고 마음아파하지 않도록 내가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 그 자리를 대신하거나 메꿔드릴 수는 없지만 그게 큰 상처로 남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새엄마를 더욱더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배치를 바꾸면서 한가지 더 발견된 것은 아빠와 엄마, 새엄마의 관계이다. 선생님이 배치를 이리저리 바꾸다가 새엄마를 엄마와 아빠 사이에 세웠는데, 새엄마가 그 자리가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이혼이든 사별이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었다면 그 사이에 설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아직도 부모님의 관계에서는 엄마가 함께 있어서 세 명이서 함께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무어라 할 말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아빠도 마음으로 엄마를 못 보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다음으로, 내가 평생을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엄마 대역이 배치를 바꾸다가 내 대역과 마주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엄마 대역이 "여기 서니까 이 딸이 눈에 띄네요. 아까는 잘 안보였는데 확 들어와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대역 대신 나에게 직접 서보라고 하셨다. 대역이 서있던 자리에 들어가서 엄마 대역을 아무말 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엄마 대역에게 "지금 (딸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니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그냥 제 맘 속에 이런 말이 자꾸 떠오르네요. 내 딸아… 내딸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 때문에 엄마 대역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억지로 겨우겨우 눈을 뜨고 그분을 바라보는데, 그분도 나처럼 많이 울고 계셨다. "천천히 갈 수 있는 만큼 엄마한테 가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뗐다. 처음에는 아주 무거운 느낌이었는데 어느새 거의 달려가다시피 나는 엄마에게 안겨서 울고 있었다. 그분에게 안겨 엉엉 울면서 나는 엄마가 결코 나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엄마가 지금 살아오신다고 해도, 내게 그렇게 말해 주실 것 같다. "내 딸아… 내 딸아…" 그동안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참 어두웠다. 엄마하고 분명 좋았던 일도 많았을 텐데, 내게 남아있는 기억이라고는 어느 날 낮에 내가 말썽을 피워서 엄마가 청소하시다 말고 나를 막 때리며 야단치는 모습이다. 그때 언니가 옆에 있었는데, 나는 엉엉 울면서 속으로 "엄마는 맨날 나만 미워해. 언니는 혼난적 없는데 맨날 나한테만 그래."라는 생각을 하며 서러워했다. 지금도 그때 그 원망스런 마음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어린 나이인 나를 남겨두고 자살을 택했다는 것 자체도, 내게는 그게 엄마가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버림받았다는 느낌. 이전에는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느낌이다. 그 느낌 때문에 나는 엄마를 더 원망하고, 마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상처가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너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다. 네가 사랑받으려면 더 노력해야 하고, 더 훌륭해져야 한다."-이것이 내가 그동안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일깨웠던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엄마에게서 들은 말은 "내 딸아… 내딸아…"였다.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내 마음을 파고든 말이었다. "나는 너를 미워한게 아니야. 내 딸아, 내 마음을 알아주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말로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마음이,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내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왔고,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가 오해해서 미안했고, 또 내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엄마의 딸이라는 것 때문에…
한참 울다가 엄마와 떨어져서 엄마에게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지시대로 "당신의 결정에 고개를 숙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언니와 둘이 손을 잡고 서서 같은 말과, "당신은 대가를 치루셨고, 우리도 대가를 치루고 있습니다."라는 말도 했다. 내가 처음에 내어놓았던 문제하고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체험된 것이었지만, 사실 우리 가족 내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또 언니와 새엄마의 관계를 풀어 가는 것은 언니와 새엄마의 몫으로 남겨둘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느낀 것중 버림받은 느낌,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느낌은 어쩌면 언니 마음에도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또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엄마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운 마음에 애써 그 빈자리를 부인하고, 새엄마가 나를 엄마 이상으로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은 내 무의식 속에 있던 것이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느낀다. 어떤 생명이든 자신의 자리가 있고, 가족이라는 공간 안에서 에너지가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엄마의 빈자리를 빈자리로 인정할 때만이 엄마를 진정으로 보낼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날에는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는데, 막상 내가 대역을 할 기회는 없었으므로 둘째날에는 솔직히 궁금해졌다. 내가 체험을 했기 때문에, 진실한 체험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도 한번 그렇게 누군가에게 대역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둘째날에, 그리고 셋째날에는 바라던 대로 대역을 했었는데, 둘째날에 느낀 것만 간단히 말하고 싶다. 둘째날에 처음 한 대역은 어떤 남자분의 부인 역할이었다. 가족 전체가 서 있는 세션에서 그분은 어머니와의 미묘한 갈등-죽은 누이로 인해 어머니에게서 떠나지 못하는-에 대해 풀게 되었다. 그런데 세션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그분은 "그래도 나는 집사람 없으면 못살아요."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아까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부인에게 직접 해보실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그분과 부인 대역인 나를 마주보게 했다. 눈을 마주하고 있는데, 정말 어색한 그 순간에 신기하게도 "아, 이분이 내 남편이구나."라는 게 느껴졌다. 부인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분이 "나는 당신 없으면 못살아."라고 말하고 나서 선생님은 다시 그분의 어머니 대역을 나오라고 하셨다. 그분과 내가 마주보고 서 있는 상태에서 그분의 오른쪽에 어머니를 세우고는 똑같은 말을 어머니와 마주보고 다시 해보라고 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 없으면 못살아요."라고. 그말을 한 뒤에, "어느쪽이 더 진짜 같아요?"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그분은 "어머니에게 말할 때 더 편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어요"라고 하셨다. 안그래도 나는 그분이 어머니에게 말씀하실 때 너무 섭섭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 후에 어머니 대역은 자리로 들어가시고 그분과 내가 다시 마주보고 선생님은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키셨다. "나는 남자입니다. 내가 남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느낀대로 "아, 그랬군요. 당신이 그랬었군요."라고 말했다. 그말 뒤에 선생님은 내게 다시 "나는 여자입니다. 내가 여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남자가 필요합니다."라고 따라하게 하셨다. 그제야 뭔가 풀리는 느낌. 불완전한 존재인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고 남자이게, 여자이게 하는 것이 부부라는 느낌.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분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럴 수도 있구나. 다른 분이 대역을 하셨을 때 이런 식의 느낌이었겠구나."하고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가족을 세워보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에서 응어리가 풀렸고, 또 대역을 하면서 다른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서 느껴보고, 관찰하는 입장에서 함께 마음을 모아본 3일간의 시간.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추를 하나씩 떼어 내고 가벼워진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계속될 가족세우기를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런 체험들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가족세우기 워크샵 참가 후기3 (지금여기 7-3호에서 발췌)

불꽃처럼 터지는 기쁨
조현미(상담연구원 부원장)

지난 2월에 독일에서 상담이나 심리학을 공부하는 독일인 그룹에 섞여 워크샵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 중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버트 헬링거(Bert Hellinger)'를 아느냐, 그가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나 인정을 받고 있느냐, 그의 워크샵에 참석해 봤느냐?`등이었다. 버트 헬링거의 이름을 처음 듣는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된 사람마다 그의 이야기를 하기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4월초에 '미내사 소식'을 읽다가 '가족 세우기' 워크샵 공고를 보았다. 버트 헬링거의 이름에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등록하였다. 강사이신 박이호 선생은 헬링거로부터 직접 가족 세우기를 배우셨다고 한다. 참석한 분들 중에는 상담을 가르치시는 교수님도 계셨고, 상담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얼굴이 맑은 비구니가 두 분이나 계셨고, 멋쟁이 노신사 한 분도 함께 하셨다. 연령에서 하는 일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약간의 긴장 속에 워크샵이 시작되었다. 워크샵은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 그리고 체험의 연속이었다. 첫 세션이 끝난 후에 누군가 나에게 소감을 물었다면 '어리벙벙'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참가자 중 누군가가 자신의 문제를 다 꺼내놓기도 전에, 아니 시작하자마자 박이호 선생은 "가족을 한번 세워 보시지요."라고 하셨다. 특별히 나이에 걸 맞는 역할이나, 비슷한 사람을 고르라는 주문조차도 없었다. 참가자는 가족 구성원으로 선택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느낌에 따라 자리를 잡아 주었다. 형제나 부모 역할을 맡은 이들이 자리잡고 서면, 꼭 죽은 이들에 대한 질문이 뒤따랐다. 흉하거나 억울한 죽음은 없었는지 꼭 확인을 하셨고 죽은 부모형제가 있는 경우에도 그들을 챙기셨다. 예를 들어 죽은 형제가 둘 있는 사람이 "형제가 몇입니까?"하는 질문에 살아있는 형제만 세어서 "셋입니다."하고 대답을 했다고 하자. 박이호 선생은 그의 입에서 죽은 자까지 합산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 질문을 계속하셨다. 그러면서 죽은 자들에게는 그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산 자들에게는 '죽었음'이 '없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시인하도록 만드셨다. 가족 구성원으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서있는 위치에서의 느낌을 물어보셨다. 누군가 불편하게 느끼면 어떤 곳이 편하겠느냐고 물으셨고 누군가 한쪽 팔이 무겁거나 저리다고 하면 자리를 옮겨 주셨다. 그래서 누구나가 다 편안하게 느끼는 자리를 찾아, 제자리를 찾아 세우는 것이다. 그런 후에 필요한 경우 사과의 말 혹은 감사의 말을 하게 하고 깊이 머리를 숙이게도 하셨다. 이 모든 과정이 십 분이나 십 오 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젠 들어가십시오"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빠르고 조용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뜨고 욕심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내가 어떤 중요한 장면을 놓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내가 대역으로 참가하면서 사라졌다. 가족 누군가의 역할을 부탁 받고 그가 세워주는 자리에 서있으면 내 것이 아닌 느낌이 감지되고 몸이 흔들리기도 하고 혹은 어떤 말이 내 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굳 이 어떤 준비도, 열심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인데 내가 대역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느껴지는 것이다. 누구의 옆에 서면 편했고 누구의 곁에서면 불편했다. 어떤 가족 구성원은 가까운 곳에 서있어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은 이상하리 만치 신경이 쓰이거나 가까이 가고 싶거나 혹은 등을 돌리고 싶기도 했다. 이것이 가족 형태장 이로구나 하고 느끼되 그 자리에 서보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꼭 필요한 질문 그리고 가족 세우기, 제자리 찾기 그리고 아주 단순한 끝내기 의식이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끝난 후에는 될수록 말을 삼가고 그 느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순간을 가졌다. 그 체험을 통해서 새삼 느낀 것은 '가족'이라는 말의 무게이다. 개인의 문제란 것들도 달리 말하자면 가족의 문제가 어떤 가족 구성원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또는 소소하고 구구절절한 개개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가족의 장에서 전체적인 맥락을 보는 것이 그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데 더욱 유용할 것이라는 끄덕임이었다. 각개의 구슬 같은 개개의 문제들 속에는 그것들을 연결시키고 있는 은줄이 있었다. 아무리 커 보이는 문제라 할지라도 대개는 소소한 문제들의 집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은줄을 찾아내어 풀어내는 순간 그 많던 문제들이 다 흩어져서 사라지거나 아주 하찮아 지거나 혹은 그 의미가 바뀌어져 버린다. 가족 세우기는 한 가족내의 이전 세대가 행한 행동이나 감정 혹은 질병을 아래 세대의 누군가가 닮아 반복한다는 '운명 따르기'를 알아채도록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족의 고유한 형태장 내에 들어가 꼬이고 막힌 부분을 찾아내어 풀어주는 작업이다. 아무런 연관도 없이 이런 저런 이유로 참가한 구성원들은 사전 정보라고는 일체 없이 누군가의 가족사에 참여한다. 그리고 서로 협력하여(협력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찾아낸다. '어떻게 우리가 그럴 수 있지?'하는 자문을 할 때도 있었다. 너무나 신선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면서도 신기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데야 어쩌랴! 가족을 세워 놓으면 뜨게질 감에서 보듯, 어디에 한 코가 빠졌는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 지가 그대로 드러나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몇 마디 주고받음으로, 몇 번의 움직임으로 아주 편해지거나 전혀 달리 보이게 된다. 끝날 때 즈음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생명의 장에서 우리 모두는 한 배를 타고 있다."고 하신 박이호 선생의 말을 깊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독일인들이 '가족 세우기'에 열광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나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것은 그 방법의 단순함과 아름다움이다. 물론 그것이 배우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나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불씨를 나누어 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혹은 '희망'이라고 쓰인 거대한 도미노의 스타트 장면을 목격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 안에서 큰 기쁨이 불꽃처럼 터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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