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우리 토양과 기후에 맞는 토종씨앗의 장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토종씨앗을 챙겨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16일 전남 장성군 남면 평사리 400m² 크기의 밭에 ‘토종씨앗 보전 실증재배지(포)’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전춘섭 씨(79)가 농민들과 함께 만든 ‘토종씨앗연구회’에서 종자를 생산하는 밭이다.
밭에는 단맛이 나는 수수가 10cm 높이로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 노율(盧栗)이라 불리는 단수수는 사탕수수와 다르다. 우리 땅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된 단수수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뒤뜰이나 텃밭에 심는 농촌의 필수작물이었다. 설탕이 부족하던 시절 단수수는 사탕을 대신했다. 50, 60대들에게는 초가을 가장 단맛이 나는 단수수를 먹었던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다. 밭에서는 단수수 외에도 토종 토마토와 수박, 콩 등이 자라고 있었다.
전 씨는 “회원 70명 중 50여 명은 평생 농사를 지은 60, 70대 농부들”이라며 “회원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보탬은 되지 않지만 토종씨앗을 보전하겠다는 사명감만큼은 크다”고 말했다.
전 씨는 1965년부터 고향인 장성군 남면에서 53년째 단감과 벼,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평생 땅을 일구고 살아온 그에게는 특별한 자긍심이 있다. 땀을 흘려 키운 안전한 농작물을 소비자에게 공급한다는 것이다. 그는 2007년부터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기적의 사과’를 키우고 있다. 기적의 사과나무는 현재 8000m² 밭에서 480그루가 자라고 있다.
전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토종씨앗을 수집하고 보전, 관리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토종씨앗의 재배기술을 농민들에게 보급하겠다는 마음도 컸다. 그래서 지난해 토종씨앗연구회를 만들어 토종씨앗 수집에 나섰다. 회원들은 집에서 키우던 토종씨앗을 전 씨에게 가져다 줬다. 일부 토종씨앗은 전남도 농업기술원에서 가져왔다. 이렇게 1년여 동안 수집한 토종씨앗은 150여 종에 달한다.
수집한 토종씨앗은 그가 지은 16.5m² 크기의 저온저장창고에 보관돼 있다. 하지만 토종씨앗을 뿌리고 재배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시설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토종 감자와 생강 씨앗을 보관할 수 있는 지하저장고가 절실하다. 시범재배를 위해 기후를 관찰할 수 있는 간이 우량계, 풍향계도 필요하다.
이병연 장성군농업기술센터 작물담당(50)은 “농민들 스스로 토종씨앗 자원을 관리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운동을 벌이고 있어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립종자원에는 현재 종자 5만1330건이 등록돼 있다. 이 가운데 20년간 품종보호를 받는 종자는 9561건이다. 품종보호등록 종자들 가운데 외국 종자는 약 24%(2309건)다. 전문가들은 토종씨앗은 생산량이 적지만 유전자원으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다. 우리 땅과 기후에 오랫동안 적응해 다양한 작물 생산에 보탬이 된다는 것이다. 토종씨앗의 수집, 보전은 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를 비롯한 각 시도 농업기술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시민단체인 토종씨드림도 나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전 씨는 토종씨앗을 키우고 나눠주는 것이 농부로서의 마지막 꿈이라고 했다. 그는 “토종씨앗은 농약과 비료를 적게 써도 된다. 후손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남겨준다는 마음으로 토종씨앗을 모으고 키워서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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